제주 4.3 평화여행-‘무장대 항쟁의 길’ 답사를 다녀와서
제주 4.3 70주년 ‘무장대항쟁의 길’ 답사를 다녀와서
– 서울KYC평화길라잡이 김선정-
아름다운 섬 제주는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위해 찾는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서 내가 찾은 제주의 아름다움에 숨어 있는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이후 ‘제주 4.3’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제주를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방문의 4.3 기억이 흐릿해질 때 쯤 서울KYC 평화길라잡이로 활동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찾은 늦가을의 제주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채 시작되었다.
‘무장대항쟁의 길’이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제주 4.3답사는 또 다른 먹먹함으로 다가왔다. 제주 4.3의 무장대 사령관이었기에 그동안 철저하게 금기시된 인물 이덕구를 찾아나서는 길. 가족묘에 덩그러니 이름만 새겨진 채 역사에서 사라진 그를 불러내 본다. 김경훈 시인이 나지막하게 건네는 이덕구와 그의 가족사는 70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회환이 묻어나왔다. 어지러운 해방공간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열망했던 사람들의 희망은 절망을 넘어 한동안 역사에서 철저히 묻혀버렸다. 1948년 4월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아래 미군정 아래서 친일경찰과 우익청년들이 제주에서 휘두른 횡포에 대항해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내걸며 무장대는 저항을 시작했다.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제주도를 떠나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맡아 마지막까지 무장대를 이끌었던 사람이 이덕구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하지도 잘 알지도 못한다. 이덕구와 무장대가 토벌대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간 곳은 어떤 모습일까? 그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려니 숲길.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산책하며 마음의 위안을 위해 많이 찾아오는 곳, 그곳에 이덕구산전이 있었다. 아름다운 사려니 숲길에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은 또 무엇일까? 비가 많이 내리면 오르지 못하는 길이라 했는데 다행히도 비는 우리가 이덕구산전을 오르는 길을 허락해주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걸어가는 사려니 숲길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길 꽃을 피운다. 예전 제주도민들도 이곳에서 바람과 나무와 풀들을 벗 삼아 각자의 삶의 조각보를 새겼으리라. 그 소리를 나는 오늘 들을 수 있을까? 길잡이가 없다면 이정표가 없다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길을 따라 초소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곳에 다다른다. 대토벌로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군부대가 주둔하자 봉개리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욱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 수밖에 없었던 ‘시안모루’ 그곳에 이덕구부대가 잠시 주둔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일대를 ‘이덕구산전’이라고 부른다고. 당시 움막을 지었던 흔적과 음식을 해 먹었던 무쇠솥과 그릇들이 그대로 널려 있다.
조촐하게 재를 올린다. 그리고 산중에 시와 노래가 울려 퍼진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편의 시가 노래 한곡이 더 많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이념이 뭔지도 모른 채 이 깊은 산중까지 숨어들어야 했던 제주도민들과 새 세상에 대한 열망을 꿈꾸다 쓰러져간 사람들이 남겨 놓은 이야기는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라는 글귀 앞에서 숨이 턱 막힌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을까? 4.3은 왜 일어났는가? 제주도민 아홉명 중 한명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가야 했을까? 70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국가폭력으로 쓰러져간 그들의 아픔은 왜 다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묻고 또 물을 수 밖에 없다. 스쳐 지나가는 제주도 그 어느 곳도 4.3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남원읍 충혼묘지에는 ‘의귀전투’에서 사망한 군인, 남원읍 일대에서 희생된 경찰, 무장대 습격으로 희생된 민보단원등을 추모하는 추모비들이 질서 정연하게 모여 있다.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를 담은 현의합장묘는 4.3당시 군인들에 의해 의귀초등학교 동녘밭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안장된 곳이다. 송령이골은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 매장된 곳이다. 당시 버리다시피 매장한 상태 그대로이며 최근까지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고 있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이 세운 표지판과 자그마한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남원읍충혼묘지, 현의합장묘, 송령이골은 같은 사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기억하는 장소이다. 정부에 의해 영웅 대접을 받으며 잘 정비되어 만들어진 남원읍 충혼묘지, 토벌대에 학살당한 유족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관계기관에 간청한 끝에 묘역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던 현의합장묘, 그리고 무장대 시신은 초등학교 뒷밭에 흙만 덮인 채로 방치되었다가 토벌대의 지시에 의해 지금의 송령이골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제주 4.3이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을 마주하는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70년 세월이 지나도록 국가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제주의 아픔은 제대로 치유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무장대항쟁의 길에서 만난 이야기는 제주를 많이 찾았음에도 처음 만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아직도 못다 들은 이야기가 제주에는 얼마나 많을까? 그렇기에 제주의 아픔이, 슬픔이 그냥 아픔이요 슬픔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미군정하에서 3.1절 시위에 나섰던 평범한 사람들을,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4.3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아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오로지 무조건적인 진압으로 유래가 없는 집단 학살이라는 강경작전을 펼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조명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국가권력이 잘못했다고 말하기까지 장장 5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직도 진실은 세상에 다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제주 곳곳에 묻혀진 진실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난 4.3을 마주할 때 그리고 우리 역사에 4.3이 제대로 자리매김을 할 때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국가가 될 것이며 그 힘으로 평화와 인권은 일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억울하게 죽어간 그 시대의 사람들과 오랜 세월 침묵을 강요당하고 ‘살아시민 살아진다’며 살아온 제주사람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본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게재되었습니다.-